벌리(Burley)는 버지니아로부터 파생된 담배 품종으로, 버지니아에 비해 낮게 자라는 습성 때문에 생산성이 좋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풍미를 지닌 연초입니다. 버지니아와 더불어 파이프 담배의 핵심 컨텐츠이며, 특히 우리가 요즘 흔히 ‘담배’라고 부르는 궐련에는 거의 압도적인 주연으로 활약중입니다. 품종의 개성보다 생산성이 우선인, 새마을의 DNA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이 벌리만 재배한다고 보면 대과가 없습니다. 가벼운 바디감에 비해 결코 만만치 않은 니코틴 함량, 그리고 알칼리 성분에 기인한 특유의 자극적인 식감 때문에 벌리가 메인인 블렌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계 모든 벌리 생산량의 70% 이상은 미국. 그것도 켄터키와 테네시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벌리가 주로 생산되는 주를 속칭 Eight state belt라고 부르고, 그 중 하나에 속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공교롭게도 8번째 주로 미합중국에 가입하였습니다. Cornell & Diehl의 마스터 블렌더인 Jeremy Reeves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농장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협력을 통해 Small Batch 시리즈를 위한 양질의 원료를 수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잘 짜맞추어 보자면, Eight State Burley라는 연초의 이름이 좀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Spec
- Blend Type: Burley Based
- Contents: Burley/Oriental/Virginia
- Cut: Ready Rubbed
- TR Score: 4.0
재료 구성이 조금 특이한데, 2014년산 벌리와 2005년산 오리엔탈, 2018년산 레드 버지니아, 2019년산 옐로 버지니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레드 버지니아는 Carolina Red Flake에 채용된 바로 그 버지니아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큰 보이차 브랜드인 대익이 4-5년 에이징된 찻잎을 자기네 보이차에 블렌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파이프 연초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무척 신선하군요.
Tin Note
토핑이라기에는 조금 과한 코코아/바닐라 토핑이 있습니다. 시연 후의 고스팅이 살짝 걱정되는 수준입니다. 이름답게 벌리 특유의 견과류/코코넛향과 바닥에 깔린 듯한 흙내음이 메인이 되며, 버지니아의 달큰새콤함이 그 뒤를 바짝 따르면서 식욕을 돋웁니다. 보기와 달리 촉감은 상당히 촉촉한 편입니다.
Smoking Note
틴 노트에서 감지된 코코아/바닐라 토핑은 꽤 오래 가는 편이나, 다음 파이핑 경험에 큰 해를 미칠 정도의 고스팅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벌리가 메인인 연초임에도 불구하고 바디감이 그렇게 비지 않는 것이 특이합니다. 아마 이건 버지니아의 역할이 클 겁니다. 채용된 벌리와 오리엔탈의 연식이 상당하므로, 생각보다 벌리의 자극이 크지 않고 대충 벌리가 들어갔구나 인식될 정도로의 개성으로 활약합니다. 오리엔탈 역시 에이징에 의해 벌리와 따로 놀지 않고 벌리의 너티함에 오밀조밀함을 더하는 정도로 적절히 역할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어쨌든 벌리 기반의 블렌드 연초이므로, 퍼핑 페이스를 올리면 파인애플을 통째 씹어먹은 것 같은 깔깔한 식감이 올라옵니다. 벌리가 들어간 연초는 무조건 살살 태우고 봐야 합니다. 미약하긴 해도 오리엔탈의 중첩 역시 존재하기 때문에, 후반부에 더 페이스를 느긋하게 잡고 피워야 합니다. 전반적으로 벌리의 개성 중에서 장점만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으며, 버지니아의 존재감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비는 맛을 꼼꼼히 채워 심심함을 덜어주는 역할 이상으로 치고 올라가지 않습니다. 벌리의 자극을 제외하면 평균보다 살짝 가벼운 바디를 가지고 있으며, 니코틴 강도는 중간 정도입니다. 룸 노트는 가벼우나, 그리 유쾌한 편은 아니며 벌리/오리엔탈 때문에 맛에서 기대되는 것보다는 좀 더 강한 편입니다.
총평
벌리 하면 일단 손사래를 치는 파이퍼도 한 번쯤 경험해볼 만한 연초입니다. 세월이 겅둥겅둥하던 벌리의 기운을 많이 죽여 두었습니다. 뒤를 받쳐주는 버지니아의 퍼포먼스가 상당히 좋아, 쉽게 지루해지지 않고 뒷심이 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중첩되는 벌리의 쌉싸름함이나 오리엔탈의 스파클링은 호불호의 개인차가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토핑이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컨텐츠 퀄리티라면, 좀 더 쌩얼로 승부했어도 충분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입니다. 고급진 파인다이닝에 미원이 끼얹어진 것 같아 피우는 내내 아쉬운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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