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에이징을 별로 신봉하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이징으로 통용되는 갖가지 미신을 혐오하는 편입니다. 그게 기계든 식품이든 말이죠. 연초에 한정지어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의 긍정적인 에이징은 이미 제조과정에서 제조사의 노하우로 이미 끝나 있는 상태로 출시됩니다. 거기서 뭔가 좀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일종의 자만입니다. 하루에도 수백kg ~ 수톤에 달하는 연초를 취급하고 연구해 온 사람보다 겨우 구력 몇년짜리 지식이 더 낫다고 여기는, 더닝 크루거 효과의 좋은 예입니다. 저 역시 꼬꼬마시절 연초를 어떻게 보관하면 더 맛있어질까를 이리저리 고민해 보았습니다만, 시간과 경험이 쌓이고 보니 원판에서 덜 깎아먹는 보관법이 최선의 보관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파이프는 관능의 영역에 속하고, 이러한 관능의 세계에서는 결국 철저하게 취향이 존중되어야 하기도 합니다. 다른 누가 보더라도 이 연초는 망했는데, 본인은 더 맛있어졌다고 느낀다면 그건 본인 나름대로 에이징에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객관은 이러한 주관들의 평균이 될 뿐이지요. 그밖에, 버지니아의 경우 숙성시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가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톤이 좀 더 차분해지고 단 맛이 증가하며, 거친 맛이나 풀향 등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스트레이트 버지니아나 버지니아 페릭, 좀 더 나아가서는 스코티시 블렌드나 혹은 이 부류에 속하지 않더라도 컨텐츠로 채택된 버지니아의 품질이 워낙 뛰어난 몇몇 연초들은 시간이 지났을 때 적당히 노련해진 맛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은 Comoy's of London에서 출시되었지만, 지금은 공식 단종된 연초인 Scottish Mixture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내 수입분은 워낙 오랫동안 재고가 남아 있는 것이라, 최소 4-5년짜리 올드 틴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십시오.

Spec
- Blend Type: Scottish
- Contents: Virginia/Oriental
- Cut Type: Ribbon
- TR Score: 2.4
보시다시피 TR 평점이 썩 좋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일부 향연초를 제외하고 TR에서 2.5점 미만인 연초를 리뷰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Tin Note
스코티시 특유의 구수시큼털털함이 있지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도적인 토핑에 밀려서 한스텝 늦게 캐치가 됩니다. 바닐라 내지 캐러멜 토핑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오래 지나 토핑의 향도 변화가 있으므로 최초에 무엇을 토핑했는지는 정확히 짚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쌉싸름한 스모키함이 스쳐 지나가지만 라타키아의 그것은 아닙니다. 일단 틴 노트가 스코티시 치고는 꽤 달콤한 편이라, 기대가 되긴 합니다. 수분은 리본컷치고 아주 살짝 높은 편입니다.
Smoking Note
바닐라인지 캐러멜인지 모를 토핑은 어쨌든 생각보다는 오래 갑니다. 문제는, 이게 전혀 스코티시 블렌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간 불량식품같은 풍미가, 차라리 이게 그냥 향연초였으면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스코티시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고소달달함과 새콤한 식감이 있지만, 정체를 모를 텁텁함에 금방 쓸려나갑니다. 오리엔탈에서 기인한 텁텁함인지, 아니면 버지니아의 품질 문제로 일어나는 거친 맛인지 살짝 모호합니다. 약간 유통기한이 지난 식용유를 머금은 듯한 불쾌감이 식감에 꽤 지속적으로 남습니다. 뒤에 남는 재의 맛도 문제인데, 직관적으로 이 연초를 구성하는 컨텐츠가 그닥 윗줄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총평
에이징에서 꽤 버프를 받는 연초라고 알려져 있어 호기심에 구입했지만, 휴게소를 지날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뽕짝 리믹스같은 느낌이라 개인적으로는 영 실망이었습니다. 차라리 지금보다 조금 이전에, 토핑된 향에 변형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였다면 그래도 태울 만 했을 연초였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연초의 퀄리티도 토핑의 퀄리티도 아랫줄에 위치해 있어 결국 안될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어설픈 토핑 대신에 라타키아를 한꼬집 섞어 맛의 굵직한 뼈대를 잡고, 블랙 카벤디시로 연초의 퀄리티를 감췄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구수함과 담배스러운 맛으로 승부하는 스코티시 블렌드에 토핑이라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이 연초는 Comoy's에서도 공식적으로 단종한 연초입니다. 연초가 단종이 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부디 이 가벼움이 마지막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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