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연초의 다양한 컷 유형 중에서, 섀그나 리본 정도를 제외하면 비애호가 입장에서 당혹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차피 이리 피우나 저리 피우나 불편한 건 매한가지인 파이프다보니, 편의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습도와 풍미를 최대한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장기 숙성시 좀 더 풍부한 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이러한 담배쟁이들의 집착(?)과 노력은 선원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장기간의 지루한 항해동안 즐길 연초를 최대한 작은 공간에 집적하기 위해 연초를 똘똘 뭉쳤다고 합니다. 보관과 운송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파이프 연초만의 깊은 풍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지 않은 메이커들이 일단 연초를 압착 가공한 다음, 어느정도 숙성을 해서 썰거나 다시 풀어내어 우리가 즐기는 형태의 연초로 제품화를 합니다. 이렇게 단단한 덩어리로 가공하면 원래 없던 풍미가 생겨난다는 노하우는 담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차(茶)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웰빙 열풍으로 함께 주목받게 된 보이차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차와 담배의 에이징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점이 많은데, 같이 공부하다보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다양한 컷 유형 중에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로프 컷 또는 트위스트 컷이라고 불리우는 형태의 연초일 것입니다. 어찌 보면 밧줄 같기도, 다르게 보면 똥 같기도 하고 엄청나게 길게 뽑은 시가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가 롤링을 하는 방법과 로프 컷을 제조하는 방법에 어느 정도 공통점은 있습니다만, 시가와 달리 로프 컷은 절대 그대로 불을 붙여 태울 수 없습니다. 잘라 보면 담배라기보다는 젤리 형태에 가까울 정도로 수분이 많은데다 밀도 또한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피우기 위해 연초를 썰고 비비는 과정조차 판 형태의 플러그보다 훨씬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로프 컷 연초는 네이비 플러그와 함께 가장 초창기 형태의 담배 가공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점점 타르/니코틴 강도가 낮은 연초를 찾는 추세 때문에, 이러한 로프 컷 연초의 수요는 눈에 띠게 줄어들고 있으며 로프 컷을 생산하는 연초 공장도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제가 알고 있는 브랜드로는 사무엘 가윗이 유일합니다. 현존하는 연초 공장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인만큼, 플러그나 플레이크도 여타 회사의 것과 다르게 모양이 균일하지 않고 제멋대로이며 맛 또한 다소 투박한 편이나, 사무엘 가윗의 연초에는 마치 시골의 오랜 씨된장을 자작하니 끓여 먹는 듯한 굵직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에 리뷰할 연초는 사무엘 가윗의 Brown No. 4입니다.

Spec.
- Blend Type: Virginia
- Contents: Virginia/Kentucky
- Cut Type: Rope
- TR Score: 3.2
예전 TR 스펙 설명에는 컨텐츠에 시가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Gawith & Hoggarth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하였습니다. 원래 들어 있던 게 빠졌을 수도 있고, 켄터키의 숙성 또는 가공 방법에 따라 시가의 힌트가 나타나기도 하므로 어느 쪽을 가정해도 말이 되긴 합니다. 아무튼 제조사의 의견을 존중하여 컨텐츠에 시가 잎을 삭제하였습니다.
Tin Note
버지니아가 주성분이긴 하지만 컷을 감싼 래퍼가 켄터키이기 때문에, 틴 노트는 켄터키 특유의 목질향, 나무뿌리향과 베이컨스러운 향, 그리고 약간의 시가 힌트가 있습니다. 버지니아의 구수달달함은 그 뒤를 은은하게 따릅니다. 비주얼적으로나 풍미적으로나 워낙 강렬한 녀석이라 놓치기 쉽지만, 밑에 깔린 꽃향 역시 존재합니다. 언듯 모양이나 만져지는 촉감으로는 다소 건조할 것 같지만, 함정입니다. 썰어보면 심지 부분은 거의 '젖어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높은 습도를 자랑합니다. 본격적으로 연초를 잘게 썰고 비비다보면 켄터키와 시가 잎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스파이시함이 본격적으로 감지됩니다.
Smoking Note
사무엘 가윗의 연초들이 대게 불 붙이기가 난해한 편이지만, 로프 컷인 Brown No. 4는 압도적으로 불 붙이기가 어렵습니다. 플러그를 자를 때 즐겨 쓰이는 주머니칼보다는 가위나 시가 커터를 쓰는 편이 추천될 정도입니다. 높은 습도 때문에 연초를 자르거나 비비는 과정에서 연초 성분이 상당히 많이 묻어나오므로, 연초를 자르고 나면 칼이나 커터 등은 반드시 깨끗이 닦아 나중에 녹이 슬거나 날이 상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챠링을 하고 나면 켄터키스러운 고기맛과 여타 버지니아에서도 쉽게 느끼기 힘든 압도적인 구수함이 치고 들어옵니다. 상당히 맛있습니다. 하지만 Brown No. 4의 진짜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압도적인 풍미보다 더 압도적인 니코틴 함량은 풍미보다도 조금 늦게 감지되기 때문에, 니코틴에 내성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내 흉통이나 두통을 느낄 정도입니다. 국내 정식 출시된 연초임에도 리뷰가 많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로프 컷 연초 중에서 Brown No. 4가 그나마 순둥순둥한 편이라니, 말 다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Brown No. 4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살살 피워야 합니다. 하지만 살살 피우자니 높은 수분과 컷의 특성상 불이 엄청나게 잘 꺼집니다. 결론은 처음부터 꼼꼼하게 잘 썰고 잘 재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마초스러운 연초를 살살 달래가면서 피우면, 잘 말린 부케에서 나는 듯한 진한 꽃향기가 감동을 선사합니다. 여타 스트레이트 버지니아에서 느껴지는 화사한 꽃향이 아니라, 말린 꽃에서 나는 차분하지만 진득한 그런 꽃향기 말입니다. 내 팔뚝에는 피 대신 니코틴이 흐르고 있다는 근자감이 있다면 다소 퍼핑 페이스를 올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켄터키와 시가의 힌트가 좀 더 앞으로 나서면서 마초적인 구수함을 띠게 됩니다. 일단 반환점을 돌면서 어느 정도 연초의 수분이 날아가고 나면, 이후로는 불 유지도 잘 되고 꽤 고르게 타들어가게 됩니다. 룸 노트는 제법 강한 편이며, 골초가 아닌 이상 그렇게 즐거워할 만한 성격은 아닙니다.
총평
초보가 태울 만한 연초는 아닙니다. 불 유지도 어려울 뿐더러, 몇 번 리라이팅만 하다가 펀치를 맞고 끽연을 포기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구력에 자신이 있다면, 한 번쯤은 올드 스쿨 파이핑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접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술술 넘어가는 양주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가 일어났더니 다리가 풀려 그대로 뻗어버렸다는 아버지 세대의 무용담이 떠오를 정도로 니코틴이 강력하니, 자신만의 느낌을 가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쿨스모킹하고 불 유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 리라이팅까지 어느 정도 텀을 두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느리게 피울 때나 빠르게 피울 때의 개성이 각기 다르고, 각자 저마다의 장점이 있습니다. 강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오래 사귀다 보면 의외로 여린 감성을 지니고 있는 그런 친우같은 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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