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연초 리뷰/국내 수입 연초

[Astley] No. 44 - Dark Virginia Flake

Jace Kai 2021. 12. 10. 22:36

버지니아는 입문자에게나 고이다 못해 썩은물들에게나 변함없이 사랑받는 연초입니다. 상당수의 블렌드에서 바디를 채우기 위해 포함되며, 버지니아로만 구성된 스트레이트 버지니아 연초는 파이프를 하는 사람이라면 취향불문 반드시 한 종류 이상은 구비해 놔야 안심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버지니아 특유의 풍미를 인지한다는 것은, 마치 고대 부족의 성인식과 같이 뻐끔이 파이퍼가 본격적인 파이프의 세계로 접어들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가지 재료만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에 변주가 거의 없을 것 같은 스트레이트 버지니아는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 연초이기도 합니다. 가공 방식/등급/사전 숙성/컷 유형에 따라 다양한 맛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세상 모든 버지니아의 맛이 같다면, 수많은 브랜드가 굳이 수많은 종류의 버지니아 연초를 이름만 바꿔가며 출시할 이유가 없겠지요.

 

높게 자라는 건 버지니아의 특성이며, 파이프 연초 컨텐츠의 절대 다수는 바로 버지니아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저의 경우 향연초에서 처음 버지니아로 넘어갈 때 Astley사의 No. 109 - Medium Flake를 거쳐갔습니다. #109는 스트레이트 버지니아 중에서도 달달고소함이 좀 압도적인 편이라, 소위 버지니아에 대한 '돈오'를 하기에 안성마춤이었거든요. 본격적으로 파이프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더 고급진 스트레이트 버지니아를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어 말 그대로 거쳐가는 연초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아직도 파이프에 입문하는 분에게는 주저없이 추천하는 연초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같은 연초라 이말이지...

Astley에서는 #109 외에도 버지니아 연초를 몇 가지 더 내놓고 있는데, #109보다 가볍고 산뜻한 느낌을 갖는 No. 55 - Elizabethan과 좀 더 숙성된 풍미를 갖는 No. 44 - Dark Virginia Flake가 바로 그것입니다. 단정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Dunhill - Flake를 이길 연초가 사실상 없기 때문에, 엘리자베탄은 패스하고 #44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애매한 요란함보다 눈이 가는 정갈한 디자인. 맛도 디자인만큼 깔끔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Spec

  • Blend Type: Straight Virginia
  • Contents: Virginia
  • Cut Type: Flake
  • TR Score: 3.3

Tin Note

레드 버지니아의 특징적인 노트인 새콤함, 말린 과일, 우디함과 동시에 약간의 흙내음이 있습니다. 단순히 레드 버지니아의 함량만 높은 게 아니라 에이징을 좀 진행한 뒤 가공한 것 같습니다. 단 내음도 평균을 상회하는 것이 단순히 묵직할 뿐 아니라 제법 다이나믹한 재미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틴 노트입니다. #109는 롱 플레이크 또는 페블 컷이라 불리우는 유형의 연초였는데, #44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플레이크 타입입니다. 플레이크치고는 두께가 조금 얇은 듯한 느낌이라, 사이즈가 큰 파이프를 쓴다면 한 장보다 좀 더 많이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습도는 매우 적절하며 쉽게 풀어집니다.

Smoking Note

토스트와 우드, 그 밑에 낮게 깔린 흙내음이 주종이며 버지니아 특유의 단 맛이 꽤 올라옵니다. 스트레이트 버지니아의 흔한 단점 중 하나인 자칫 심심해질 수 있는 면이 #44에는 없습니다. #109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좋게 말하면 재미있는 버지니아이고 나쁘게 말하면 버지니아치고 조금 과장스러운 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초딩 입맛이라 긍정적이었습니다. 맛의 변화도 큰 폭으로 변하지 않고 꾸준한 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파이핑 도중 문득문득 퍼핑이 거칠어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마치 정비 상태가 불량한 국도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듯한 느낌입니다. 소위 말하는 '꺾임'과는 다른 것이, 그러다가 나아지고 다시 거칠어지고를 간헐적으로 반복합니다. 파이프와 함께한 시간이 늘고 보유한 연초가 다양해질수록 저마다의 개성보다는 깔끔함을 중요시하게 되는데, #44는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분명 플레이크에 포함된 정맥도 얼마 없었고, 만져지는 질감으로는 이럴 리가 없어야 하는데 말이죠. #109번이 엄청 재미있는 연초였음에도 결국 거쳐가는 연초가 되었던 이유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원재료가 되는 연초의 등급이 살짝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총평

스트레이트 버지니아 리뷰는 정말 힘이 드네요. 미묘한 차이점들을 글로 풀어 낸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새삼 깨닫고 겸손해지기로 했습니다. (ㅋ;;)

일단 굉장히 좋은 버지니아입니다. #109가 버지니아 특유의 달콤함과 고소함의 끝을 보여준다면, #44는 성숙한 버지니아가 낼 수 있는 맛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벌리의 끝에 Solani - 656: Aged Burly Flake가 있다면 버지니아에는 #44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버지니아들이 언젠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매우 기분이 들뜨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씩 전조없이 닥치는 급발진 구간은 옥의 티라 하겠습니다.

제품화 이전에 사전 숙성을 진행한 게 거의 확실한 것이, 이 정도 질감이나 뒷심을 가진 버지니아 연초라면 어느 정도 구강이 피로해지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44는 거짓말처럼 편안합니다. 여느 버지니아 연초로 이정도의 부드러움을 구현하려면, 적어도 구매하고 5년은 집에서 묵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급발진 구간이 군데군데 있기 때문에, 편안하더라도 천천히 파이핑하는 것이 추천됩니다. 뭐, 어떤 연초든 느리게 쿨하게 피우는 게 항상 가장 맛있긴 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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