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은 분야를 막론하고 유명한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편입니다. 20대 초반이었던 저를 처음 덕질의 세계로 이끌어준 선생님은 이를 인구의 특이점으로 해석했습니다. 취향의 다양성이 시장성을 가지려면 일정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고, 대한민국은 인구가 임계점에 못 미치기 때문에 먹거리, 문화, 취미 등이 급격히 심플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인구를 가진 프랑스를 보면 그게 꼭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떤 집단에 속해야 안정감을 느끼느냐, 아니면 나만의 무엇을 가지고자 하는 욕구가 그 안정감을 이기느냐의 문제인듯합니다.
이는 국내의 무수한 취미 중에서도 가장 매니악하다 할 수 있는 파이프 담배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몇몇 특정 브랜드에 대해 충성도가 몰빵이 되는 현상이 좀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 수입되는 연초가 상당히 한정적이기에 시야가 넓어지기 힘든 환경 탓도 있겠지만, 마냥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도나도 연초를 해외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는데도 결국 구매하는 것은 상당수가 국내에도 이미 판매중인 연초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몇몇 유명 블로거의 하마평에 의해서 검증된 연초가 집중적으로 구매되고 다시 그 평가가 별 비판 없이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하찮은 필력으로 연초 리뷰 블로그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담으로, 국내 판매중인 연초는 되도록 국내에서 구매하시기를 정중히 권합니다. 2만원 이내의 예산으로 한참을 즐길 수 있는 파이프 연초를 조금 더 싸게 피우겠다고 해외구매하는 것은 일단 조세 회피의 문제에서 떳떳하지 못하며, 장기적으로는 국내 파이핑 환경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잡설은 여기까지만 하고,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Peter Heinrichs라는 독일 메이커의 연초인 Curly Block을 리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로 Curly Block은 더이상 Peter Heinrichs에서 생산되지 않고, Mac Baren에 의해 제법이 변경되고 Wessex에서 브랜드를 달고 생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리뷰할 연초는 올드 버전으로, 지금은 일반적인 경로로 구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십시오.

Spec
Tin Note
버지니아의 시트러스함과 우드, 달콤함이 굉장히 침샘을 자극합니다. 더불어 페릭의 말린 과일향과 톡 쏘는 듯한 노트가 생 연초에서 올라올 정도로 페릭의 존재감이 큽니다. 5년 이상 잘 숙성한 연초에서나 감지될 법한 흙내음 역시 깔려 있습니다. 연초 덩어리의 색상은 편차가 꽤 있는 편인데, 대체로는 새까맣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어두운 갈색이며 간간히 플러그를 감싸고 있는 담배의 층이 옐로우 버지니아일 때만 암갈색을 띠는 정도입니다. 플러그 타입 연초답게 수분량이 상당합니다. 수분 함량이 높으므로, 단단한 밀도에 비해 얇게 자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Smoking Note
수분 함량에서 예상되는 것과는 달리 불 붙이기는 쉬운 편에 속합니다. 이러한 플러그 연초는 써는 두께에 따라 다양한 맛을 보여주는데, 섀그에 가깝게 얇게 저미면 흑설탕이나 카라멜과 같은 달콤함이 부각되고 두껍게 썰면 우디함과 가죽향과 같은 젠틀한 노트가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메인 컨텐츠인 버지니아는 처음부터 6주간 숙성된 다음 제조되므로, 마치 몇 년을 묵힌 듯한 흙내음과 차분한 톤이 있습니다. 챠링부터 느껴지는 페릭의 존재감은 상당히 강하지만, 첫 챠링때의 강도가 중첩되는 타입은 아닌지라 그럭저럭 피울 만합니다. 바디에서도 끈적함이 느껴지는 것이, 마치 Samuel Gawith의 핫프레스 연초를 태울 때의 점성과 밀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피니시를 보여줍니다. 니코틴의 강도가 높지는 않지만, 페릭 때문에 혀가 쉽게 지칠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버/페의 광팬이 아니라면, 이걸 하루 종일 물고 있기는 쉽진 않을 것입니다.
수분 함량과 컷 특성 탓에 연초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꽤 천천히 타들어갑니다. 확실히 최상급의 원료를 때려박았다고 여겨지는 것이, 큐어링한 담배잎을 통째로 겹쳐서 찍어낸 연초라 담뱃잎의 정맥 함량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피우는 내내 맛이 꺾이거나 거칠어지는 포인트가 거의 없습니다. 세금을 제외한 가격이 국내 출시된 여간한 연초보다도 비싼 연초인데, 막상 태워보면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하고 절로 수긍을 하게 됩니다. 룸 노트는 버지니아치고는 다소 강한 편입니다. 페릭의 높은 함량 때문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총평
Samuel Gawith - Full Virginia Plug에 페릭을 때려박은듯한, 또는 Peterson - De Luxe Navy Rolls를 스토빙해서 5년정도 묵힌듯한 맛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FVP보다 깔끔하며, DLNR보다 진합니다. 가히 버지니아/페릭 블렌드의 정점으로, 이거 한 덩이면 한동안 다른 버지니아/페릭 블렌드를 찾지 않을 정도의 마성이 있습니다만, 아쉬운 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연초라는 점이겠지요. Wessex에서 생산된 버전은 벌리가 추가되면서 예전만큼의 매력이 없습니다. 맛이 좀 더 마일드해지고 데일리로 즐길 만한 연초가 되었다지만, 데일리로 즐길 만한 버지니아/페릭 블렌드는 평생 순회공연을 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널렸습니다. 대체 Mac Baren은 Three Nuns도 그렇고, 왜 전설적인 연초에 벌리나 켄터키 따위를 끼얹어 망쳐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한참 이 연초에 미쳐있을 때는 매번 두 덩어리씩, 소포 하나가 도착하면 바로 다음 두 덩어리를 주문하는 식으로 수집하다시피했는데, 이게 사실상 단종을 고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부지런히 모아둘걸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 Peter Heinrichs 제조 당시 평점은 4.0이었습니다. [본문으로]
'파이프 연초 리뷰 > 단종 연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Sutliff] Crumble Kake Barrel Aged Series No. 3 (0) | 2022.04.24 |
|---|---|
| [McClelland] Balkan Blue (0) | 2022.04.24 |
| [Comoy's of London] Scottish Mixture (0) | 2021.12.24 |
| [McClelland] Syrian Star (0) | 2021.12.11 |
| [Cornell & Diehl] Carolina Red Flake with Perique 2021 (0) | 2021.11.30 |